세계에서 고령화 비율이 가장 높은 일본에서는 고령자의 삶의 질 보장이 매우 중요한 정책적·사회적 과제이다. 일본에서는 20세기 중후반까지 시설을 중심으로한 고령자 복지가 정책적인 기조였으나, 현재는 ‘시설 입소’를 전제로 한 돌봄에서 벗어나, 고령자가 가능한 한 오랫동안 자신이 거주해온 지역에서 생활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에이징 인 플레이스(aging in place)’ 의 실현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에이징 인 플레이스의 실현을 위해서는 배리어프리 주거 환경, 견고한 지역 커뮤니티, 그리고 의료 및 돌봄 서비스 등 다양한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특히 고령자 시설은 단순한 보호 공간을 넘어 의료, 간호, 재활 서비스를 통합적으로 제공함으로써 신체적·정신적 기능 저하를 완화하고, 가족의 부담을 경감하는 중요한 사회 인프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또한 지역 주민과의 교류 및 여가·활동 프로그램을 통해 고령자의 사회적 고립을 해소하고, 지역 내에서 지속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커뮤니티 거점으로서의 기능도 요구되고 있다.
52간의 툇마루 이시이 씨네 집

「52간의 툇마루 이시이 씨네 집」(간(間)은 일본 목조건축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척관법 모듈로 1간은 1820mm이다)은 지역에 열린 고령자시설의 선진적인 모델로 주목 받고 있다. 이 곳은 고령자 데이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설을 넘어, 지역 주민과 시설 이용자가 공간과 일상을 공유하는 장소로 기능하고 있다. 건축공간, 시설 운영의 실험을 통해 지역에 열린 고령자 시설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시이 씨네 집의 건축적인 특징

이시이 씨네 집은 2022년 오픈한 데이서비스 시설로 치바현 야치요시에 위치한다. 시설의 대표는 이시이 씨이며, ‘이시이 씨네 집’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적인 시설보다는 주택에 가까운 아늑한 분위기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이시이 씨네 집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는 부지가 남북으로 길고 절벽에 접해 있어 지역 조례에 따라 건축 가능한 범위가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지 조건을 활용해 폭 4.55미터의 툇마루와 지붕을 일직선으로 배치한 구조로 설계되었다.
지붕과 기둥, 바닥으로 이루어진 프레임에 최소한의 매스를 삽입하여 공간을 구성함으로써 외부와 지역사회에 열린 이미지를 연출한다. 지붕 아래에는 카페 공간, 데이서비스 공간, 다다미와 욕실 공간이 배치되어 있으며, 이 세 공간 사이에는 반 외부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반 외부 공간에는 외부와 접할 수 있는 의자나 벤치 등이 놓여 있고, 삽입된 매스와 반 외부 공간 사이 경계에는 큰 창을 설치하여 두 공간 간의 연결성을 강조하였다. 건물 내 모든 공간은 복도나 홀이 아닌, 작은 장소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공간 구성은 고령자를 단순히 관리하기 위한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만의 스타일과 속도로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이시이 씨네 집의 운영

이시이 씨네 집의 운영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일반적인 데이서비스나 고령자 시설에서는 하루 일과가 미리 정해져 있다. 식사 시간, 레크리에이션 시간, 목욕 시간 등 하루 일과가 운영자의 효율성을 위해 계획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시이 씨네 집은 정해진 일정이나 프로그램이 없으며, 이용자가 원하는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차를 마시거나 툇마루에 앉아 풍경을 감상하거나, 다른 이용자와 담소를 나누는 등 각자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곳은 보호나 돌봄, 재활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각자의 취향과 의지가 존중되는 느슨한 일상을 누리는 공간이다.
또 다른 특징은 지역사회에 열린 공간이라는 점이다. 이시이 씨네 집은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아이들은 정원에서 공놀이를 하거나 카페 공간에 앉아 숙제를 하기도 한다. 또한, 데이서비스 시설 안으로 들어와 이용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가능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고령자는 단절된 보호 공간의 수용자가 아니라, 아이들과 소통하며 조언을 해주는 지역사회의 어른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는 특별한 이벤트를 통한 세대 간 만남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교류이다. 과거에는 세대 간 관계 형성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연령별 혹은 돌봄 유형별로 구분된 기존 시설 구조에서는 이러한 세대 간 교류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 이시이 씨네 집은 세대 간 교류를 염두에 두고 건축 공간을 설계했으며, 운영 면에서도 이를 적극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시사점
이시이 씨네 집은 지역 주민 모두에게 열린 공간으로, 고령자와 지역사회를 연결하는 중간 영역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제도적 서비스와 비제도적 지원이 한데 어우러져 지역 커뮤니티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구조가 형성된다. 일본에서는 고령자 돌봄뿐만 아니라 어린이 돌봄에 대한 가족의 부담이 커지고 단독 고령자 가구가 증가하는 현실 속에서, 이와 같은 구조는 동거 가족에게만 돌봄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지역 전체가 돌봄의 기반이 되는 모델을 제시한다. 이러한 열린 고령자 시설을 어떻게 지원하고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것인가는 고령사회를 맞이하는 모든 국가와 사회, 커뮤니티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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